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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내 신한청년당과 3·1운동

초록/요약

이 글은 새로 발굴한 자료들에 근거해 3·1운동 전후 신한청년당의 활동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이 글이 새로 활용한 자료는 신한청년당의 기관지 󰡔신한청년󰡕 국문판 창간호 및 제2권 제1호(통권 2호), 송헌주에게 발급된 신한청년당 당원통보문서, 여운형이 윌슨 미국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에게 보낸 청원서 등이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여름 무렵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국유학생 그룹으로 태동되기 시작했으며, 1918년 11월 28일 여운형과 크레인특사와의 면담을 기점으로 창당되었다. 신한청년당에는 모두 4그룹이 결집했는데, 여운형 중심의 중국유학생 그룹, 김규식 중심의 친인척 그룹, 장덕수 중심의 일본유학생 그룹, 그리고 3·1운동 이후 가담한 그룹 등이다. 여운형은 재중국 독립운동 조직이자 유학생 교육기관이었던 동제사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조동호, 선우혁, 장덕수, 이광수 김규식 등 신한청년당의 핵심인사들은 동제사의 주역이기도 했다. 즉 신한청년당은 동제사의 활동관성과 역량을 계승하는 한편 여운형 중심 그룹의 새로운 기풍과 돌파력, 기획력, 실행력을 결합한 조직이었다.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대표·밀사의 파견과정은 신한청년당이 3·1운동기 한국독립운동에 끼친 영향과 공로를 보여준다. 파리로 파견된 김규식 뿐만 아니라, 간도·시베리아로 파견된 여운형, 일본으로 파견된 장덕수, 중국·일본을 오고간 이광수, 국내로 파견된 선우혁·김철·김순애·서병호 등은 김규식의 파리강화행을 선전·격려하고 모금활동을 펼침으로써 동경 2·8독립선언과 3·1만세시위운동의 기획자이자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3·1운동이 발발하리란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3·1운동의 대폭발 이후 독립운동의 주역이자 신성(新星)으로 재탄생했다. 창설 이후 신한청년당의 활동 가운데 새로운 사상, 이념을 추구한 부분도 새로 밝혀졌다.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에 따르면 신한청년당의 당강(黨綱) 가운데 사회개조와 세계대동은 사회주의적 지향과 방향을 강하게 내포한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혁명 이후 상해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진영의 새로운 방향모색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신한청년󰡕 창간호(국문본)에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애국가 가사 원문이 그래로 포함되어 있다. 지금까지 󰡔신한청년󰡕 창간호(국문본)는 마이크로필름으로 컬럼비아대학에 소장되어 있으며, 신용하교수 등에 의해 발굴·활용된 바 있다. 그런데 󰡔신한청년󰡕 창간호(국문본) 원본이 현재 미국 하버드옌칭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 새롭게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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